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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713-8267 (Print)      |      ISSN 2713-8275 (Online)

 

60집 | 조선후기 무예별감의 활동과 인식 (송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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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문학연구소 작성일22-04-30 16:06 조회1,0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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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예별감은 훈련도감 소속의 군사로 조선후기 왕의 宿衛를 담당했다. 임진왜란 시기에 선조가 환도한 직후 만들어졌으나, 정식관청이 설치가 된것은 1630년이다. 이후 17∼19세기 조선의 정치 변동에 따라 점차 규모를확대해 왔다. 무예별감은 훈련도감 소속 군사 중에 무술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선발했다. 왕은 무예별감의 실력을 정기적으로 평가하고, 상을 내렸다. 이와 더불어 試射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자에게는 殿試에 응시할 자격까지 주었다. 왕은 무예별감의 실력을 평가하고, 실력이 뛰어난 자들에게는 여러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여러 고충으로 인해 무예별감 중에 도망가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을 막기 위해서 도망자를 처벌하는 법률을 만들기도 했다.

 영조에게 무예별감은 王人이자 親兵이었다. 특히 영조는 이들을 궁궐의친군으로 간주하면서 불미스러운 일로 무예별감의 파면을 청한 훈련대장을 파직하기도 했다. 정조 또한 공공연하게 무예별감을 왕인 혹은 친병이라고 언급하면서 이들의 위상이 손상되는 것은 왕 혹은 나라의 체모가 손상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무예별감은 금전적인 여유를 통해 당시 서울의 유흥문화를 즐겼다. 이들은 음주로 인해 폭력을 행사하거나, 妓房에 출입하고 妓夫가 되었고, 놀음판을 열기도 했다. 정조는 이에 대해 엄격하게 처벌했지만, 무예별감의 기방출입을 막지는 못했다. 왕인이면서 동시에 왈짜로 회자되는 무예별감은 조선후기 서울이라는 도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주제어: 武藝別監, 曰者, 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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